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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정철진 2017-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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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리문답서 전의 역사적 배경

본 교리문답서는 독일 지역에서 만들어진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이다.

독일은 이미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신앙을 받아 들였던 지역으로서 활발하게 종교개혁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던 지역이다.

그러나 1540년을 접어들면서 하이델베르그에서는 새 신앙의 모습이 제시되고 있었다.

그것은 1546년 프레데릭2세에 의해서 좀더 바른 신앙의 모습을 세우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프레데릭 2세는 멜랑히톤을 초빙해서 신학 교수로 세우고자 했으나 멜랑히톤이

이를 거절하고 단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는 정도에 머물렀다.

 

그러나 멜랑히톤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프레데릭에게 끼쳤으며,

그 결과 멜랑히톤의 신학적 사고처럼 하이델베르그에서는 루터주의와 칼빈주의의 신학을 조화 시키려는 모습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루터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서가 교리적인 기초에 제시되었으며,

또한 예배의식에는 쯔빙글리의 방식이 채용되었다.

 

그리고 16세기의 정치적 혼란으로 하이델베르그에 칼빈주의 자들이 속속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결과 하이델베르그에는 루터파의 칼빈파와 쯔빙글리파가 혼합되어 발전하는 양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공재설성찬식 때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떡 안에

그리고 떡과 함께, 또한 떡 아래에 임재하시기 때문에 떡을 먹는 것은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라는 주장.

이것은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 즉 떡과 포도주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설과 거의 비슷한 것이다.

이 모든 개혁교회에서는 바른 신앙의 내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부되었다.

이에 대한 입장 표명에 따라서 각 분파가 심하게 충돌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사람이 프레드릭 3(Frederic)였던 것이다.

그는 각 교파를 화해시키려는 노려을 하면서도 칼빈주의 신학정신에 많은 호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신학적인 혼란을 제거하고 또한 후손들의 건전한 종교교육에 건전한

기도가 될 수 있는 신앙교육서를 제정하고자 하는 작업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독일의 선제후프레드릭 3세의 명령에 의하여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인

우르시누스(Zacharius Urinus)와 궁정 설교자인 올리비아누스(Caspar Olevianus)에서 본 요리문답을 작성하도록 제시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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